초기 중세 유럽에서 돼지는 광활한 참나무 숲에서 방목되며 도토리를 먹고 지방을 축적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왜 자유 방목 방식의 양돈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까? 또 현대의 베이컨용 돼지 품종은 언제부터 등장했을까?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경제사의 이야기’ 채널의 저자 알렉산드르 이바노프가 전한다.
■ 가정용 돼지는 본래 성질이 사납고 힘이 센 야생 멧돼지에서 유래하였다.
이 멧돼지를 길들이고 가축화하는 과정은 수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마침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가정용 돼지에 가까운 형태의 동물을 인간이 얻는 데에 성공하였다. 가축화 과정에서 돼지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먼저 멧돼지의 무기이자 위협이 되는 송곳니가 현저히 짧아졌으며, 번식을 위해 온순한 개체들이 선택되어 현재의 돼지는 성격이 온화해졌다. 외형적인 변화도 있었다. 멧돼지는 앞다리 쪽이 발달해 몸통 비율이 앞쪽 3: 뒤쪽 1에 가깝지만, 가정용 돼지는 반대로 앞쪽 1: 뒤쪽 3의 비율을 보인다.
그런데도 인간이 돼지를 선호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인 특성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 마리 돼지로부터 다량의 고기와 비계를 얻을 수 있고, 가죽과 털 등 다양한 유용한 부산물도 생산된다. 또한 돼지는 높은 적응력을 갖추고 있어 잡식성으로 다산하고, 자손은 빠르게 자란다. 참고로 이러한 높은 번식력은 동시에 높은 질병 감수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돼지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많은 질병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 돼지의 가축화는 약 12,700~13,000년 전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이후 빠르게 퍼져나갔다.
예를 들어 약 11,400년 전의 돼지 유골이 키프로스 섬에서 발견되었는데, 유전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돼지들은 대륙에서 섬으로 이주해 온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약 8,000년 전(다른 연구에 따르면 10,000년 전)에는 동남아시아, 특히 중국에서도 독자적으로 돼지가 가축화되었으며, 이 지역에서는 돼지가 가장 흔하고 중요한 가축으로 자리 잡았다. 오랜 시간 동안 돼지는 반야생 상태로 사육되었는데, 이는 돼지들이 숲에서 먹이를 스스로 잘 찾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뉴기니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돼지를 키우고 있다.
또한 돼지는 잡식성이기 때문에 몇몇 나라에서는 돼지를 인분 처리용 동물로 사용한 사례도 있다. 중국과 인도에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른바 ‘돼지 화장실’은 사람이 배설하면 돼지가 그 배설물을 먹는 구조다. 중국에서는 돼지우리 위에 화장실을 2층 구조로 짓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경제적으로 보면 이러한 구조는 효율적일 수 있으나, 이런 방식으로 사육된 돼지의 고기를 섭취하는 것이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이 시스템은 곧 빠르게 사라졌다. 실제로 해당 방식이 위험하다는 명확한 과학적 증거는 없지만, 대부분은 위생상의 이유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도 이런 방식이 일부 지역에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예를 들어 인도의 고아 주와 중국 북부 일부 지역에서 여전히 존재한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2005년 이후 돼지 화장실 사용을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엄격히 비추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돼지 화장실은 우리에게는 다소 놀라운 방식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방식이 도입된 지역에서도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고대 중국에서는 화가들이 잔인할 만큼 사실적으로 동물을 그리는 경우가 있었다.
■ 고대 시대에 들어서면서 돼지 사육과 돼지고기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식재료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도 돼지에 관한 이야기나 언급이 자주 등장하며, 돼지치기 또한 그의 저작이나 후대 작가들 사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돼지치기’라는 직업 자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돼지는 늘 외양간이나 마당에서 키우는 동물이 아니었으며, 본질적으로 스스로 먹이를 찾는 능력을 지닌 동물로 여겨졌다. 실제로 돼지는 거의 모든 것을 먹는다. 풀, 나무껍질, 식물 뿌리, 곤충 유충, 지렁이, 뱀(돼지는 뱀독에 면역이 있는 네 가지 포유동물 중 하나다), 작은 새와 동물, 조개류, 생선까지 섭취할 수 있다.
따라서 돼지치기의 주된 역할은 포식자로부터 무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돼지가 가진 왕성한 식욕과 잡식성으로 인해 자칫 사람이나 이웃의 농작물을 해치는 일을 막는 데 있었다. 돼지는 경작지에 있어서 자연재해보다도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밤이 되면 돼지 떼는 외양간으로 돌려보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돼지는 약 90일 동안 비육시키며 빠른 증체를 위해 곡물 사료를 먹이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자체 곡물 생산량이 부족했던 당시의 가난한 그리스에서는 이러한 방식에 어려움이 있었고, 대부분의 돼지 사육자들은 비용 효율적인 방목 방식을 선호했다.
로마에 이르러 돼지고기는 가장 인기 있는 육류가 되었으며 다른 모든 고기들을 압도하였다. 심지어 오늘날 유럽에서는 식용으로 사용되지 않는 유선(젖샘) 같은 부위까지도 식용으로 사용되었다. 돼지고기로 만든 다양한 종류의 소시지 또한 인기를 끌었으며, 특히 로마인들은 ‘루칸 소시지(Lucanica)’를 사랑하였다. 이 소시지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그 이유 중 하나는 고대 로마 요리서인 ‘아피키우스 요리서’를 통해 그 레시피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시피에는 다진 돼지고기에 간 후추, 루타(약용 식물), 셀러리, 월계수를 섞고, 로마인들이 필수 조미료로 여겼던 액젓인 가룸을 듬뿍 넣은 뒤, 깨끗이 씻은 돼지 창자에 채워 훈연하라고 나와 있다. 이 소시지는 제국 전역에서 판매되었고 가격이 저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매우 높았다.
돼지고기는 로마인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흔히 알려진 ‘빵과 서커스’라는 구호와 더불어 로마는 가난한 시민들에게 돼지고기를 공급했다. 특히 이탈리아 남부에서 많은 돼지고기를 구입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겨울철로 간주하는 5개월 동안 매달 약 5파운드(약 2.4kg)의 돼지고기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돼지고기에 대한 로마인의 특별한 애정은 당시 로마 정부가 이 고기의 가격을 통제하려 했던 시도와도 연결된다. 그 시도는 항상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특정 시기부터는 제도적으로 정례화되었다. 이 조치는 모든 시민이 돼지고기를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그 결과 돼지 사육에 관한 매우 유용한 문헌이 다수 남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카토, 바로, 플리니우스(플리니우스 대), 콜루멜라 등 다양한 관찰력과 경험을 갖춘 인물들이 돼지 사육에 대한 글을 남겼다.
■ 돼지 사육의 전통은 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에도 유럽에서 계속 이어졌다.
유럽에 살던 여러 부족은 바론(Varro)의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돼지 사육의 경제적 이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실제로 로마 시대 후반에는 이른바 ‘야만인’들도 돼지고기를 로마로 수출하는 법을 배웠으며, 특히 ‘베스트팔렌 햄’이라 불리는 지방 특산 돼지고기는 대도시 로마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유럽은 돼지를 키우기에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당시 유럽 대륙은 참나무 숲으로 뒤덮여 있었고, 참나무 숲은 돼지에게는 최고의 먹이 창고였다. 돼지들은 이런 숲에서 여름 한 철만으로도 충분한 체중을 빠르게 불릴 수 있었다. 또한 숲의 진흙은 돼지에게 필수적이었다. 돼지는 체온 조절 능력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더운 날이나 추운 날 모두 진흙이 필요했고, 진흙 목욕은 해충을 제거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더럽다’고 여겨지는 돼지는 실은 매우 ‘청결한’ 동물이었다.
가을이 되어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돼지를 도살했다. 한 마리 돼지는 매우 많은 양의 식량을 제공하기 때문에, 도살 후에는 오래 보관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되었고 자연환경을 이용한 저장법이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염장과 훈연이다. 돼지기름(비계)은 통에 넣고 소금을 듬뿍 뿌려 저장하였고, 고기 부위는 훈연하여 보존하였다. 이러한 보존 방식은 앞서 언급된 로마 시대의 소시지 제조법과도 연결된다. 로마인들은 단순한 고기뿐 아니라 비계, 선지 소시지, 훈제 및 건조육류를 모두 즐겼으며, 건조 햄은 본래 에트루리아인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이후 이 기술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돼지고기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육류였으며, 대규모 돼지 무리를 소유하는 것은 곧 부의 상징이었다. 예를 들어 샤를마뉴 대제의 유언장에는 자신이 소유한 수백 마리의 돼지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하지만 13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러 돼지 개체 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일시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배경에는 숲을 경작지로 전환하는 변화가 있었다. 대륙 전역을 뒤덮었던 방대한 참나무 숲이 점차 사라지면서, 돼지는 자신들의 이상적인 환경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대규모 사육이 어려워졌다.
당시로서는 이러한 변화를 보완할 사육 방식이 존재하지 않았고, 사실상 참나무 숲에서의 방목만큼 경제적인 방식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유럽은 대규모 돼지 사육의 시대를 마감하게 되었고, 돼지고기는 가장 대중적이고 저렴한 고기라는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돼지 품종에도 변화가 생겼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에서 유입된 청결한 품종의 돼지들은 점차 야생 멧돼지와의 교잡이 이루어지면서 성질이나 외모가 달라졌는데, 이는 숲에서의 방목이라는 사육 조건에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데도 돼지는 농가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규모가 작아졌을 뿐이다. ‘돼지치기’라는 직업은 사라졌고, 돼지는 마당 뒤 우리에서 키워졌으며, 가정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로 키울 수 있는 정도의 수만 사육되었다. 가령 가족이 크거나 영주의 가신들이 많은 대가문에서는 여러 마리의 돼지를 사육할 수 있었고 소규모 가정에서는 한두 마리 정도를 키웠다.
뒤러가 그린 돼지치기 모습은 중세 이후 수 세기 동안 유럽에서 돼지를 기르던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시점에서 유럽의 돼지 사육사를 잠시 멈추고,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에서 돼지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집과 가정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어떤 자료에서는 돼지가 신격화되었다고까지 쓰고 있으며, 그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표현은 그 의미의 강도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면도 있다.
중국 한자 중 ‘집’ 혹은 ‘가정’을 뜻하는 ‘가(家)’라는 글자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윗부분은 ‘지붕’을 아랫부분은 ‘돼지’를 의미한다. 이 조합은 곧 ‘돼지가 지붕 아래에 있는 곳이 집’이라는 뜻이다. 이는 돼지가 단순한 가축을 넘어 가족의 삶에 뿌리내린 존재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중국에서의 돼지 사육은 유럽과 비슷하게 이루어졌고, 역시 숲에서 방목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중국 역시 유럽과 마찬가지로 숲이 빠르게 사라지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 현상은 유럽보다 오히려 앞서 송나라 시기(10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그 결과 역시 같았다. 돼지 개체 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대규모 방목지와 돼지 떼는 사라졌으며, 가정에서는 뒷마당의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소규모로 돼지를 기르게 되었다. 울타리를 벗어난 돼지는 밭을 초토화하는 존재였기에, 그 피해는 마치 자연재해에 가까웠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돼지의 배설물을 비료로 활용해 왔으며, 이 점 또한 돼지를 키우는 데 있어 추가적인 장점으로 여겨졌다. 중국의 특징 중 하나는 돼지를 거의 폐기물 없이 전부 활용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별로 인기 없는 내장, 위, 비장 같은 부위도 중국에서는 요리에 풍미를 더해 주는 재료로 평가받았다.
유럽에서는 숲이 줄어들면서 양 사육이 증가했고, 양모가 중요해짐에 따라 돼지고기는 소고기나 양고기, 가금류와 경쟁해야 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말, 낙타, 당나귀 등 다른 동물의 수가 증가하고, 그 고기가 식용으로 이용되었음에도 돼지고기의 지위는 대체되지 않았다. 돼지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중국인의 식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육류로 남아 있다. 돼지가 있는 곳이 가정이라는 인식 또한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물론 돼지를 키우는 비용은 과거보다 많이 올랐고 그에 따라 돼지고기 가격도 상승하였다. 하지만 이 변화는 오히려 돼지 사육을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제는 중국인들뿐 아니라 중국 주변의 유목민족도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중국인과의 교역에서 유리한 상품으로 활용했다. 이로써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국 북부 지방, 과거 유목민들이 살던 지역이 중국 내 주요 돼지고기 공급지 역할을 하고 있다.
■ 16세기 스페인의 항해자들은 새로운 지역을 개척할 때 특별한 방식으로 준비하는 실용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그들은 쉽게 상하는 고기 대신 살아 있는 동물을 함께 데려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남는 동물을 아예 그 지역에 풀어 놓아 나중에 다시 돌아왔을 때 사냥하거나 길들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 말, 그리고 돼지가 아메리카 대륙에 유입되었다. 이들 동물은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고, 먹이를 잘 찾아내며 번식했다. 야생화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다음 이주민들을 위한 훌륭한 식량 자원이 되었다.
그러나 돼지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문제가 많았다. 밭을 습격해 작물을 먹어 치우는 것뿐만 아니라, 송곳니로 밭과 정원을 파헤쳐 작물을 뿌리째 뽑아내기까지 했다. 잡식성이자 강한 식욕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그런데도 아메리카에서는 돼지 사육 경제가 매우 잘 자리 잡았다. 삼림이 풍부했고, 돼지는 숲속에서 별다른 관리 없이도 잘 자랄 수 있었으며, 이는 유럽이 참나무 숲으로 덮여 있던 시절의 전통적인 사육 방식과 매우 흡사했다. 비록 식민자들이 그 기억을 공유하진 않았더라도 경제 논리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이끌었다.
■ 이처럼 돼지고기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며 여러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동시에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문화도 존재해 왔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 섭취를 신앙의 상징처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금기에 대해 다양한 합리적 설명이 시도되었다. 가장 흔한 설명은 더운 기후에서는 돼지고기가 쉽게 상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금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더운 지역에서는 돼지고기가 널리 소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제로 돼지 사육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발생지와 가까운 지역에서도 잘 이루어졌으며 기후는 큰 장애가 아니었다.
또 다른 해석은 돼지가 불결한 동물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에서는 돼지치기에게 신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돼지를 만진 사람은 반드시 씻고 옷을 빨아야 했다. 돼지가 뭐든지 먹는 잡식성 동물이라는 점이 이러한 불결한 이미지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문화적 차이에 주목한 해석도 있다. 농경민족은 돼지를 일찍부터 가축으로 삼았으나, 유목민족에게 돼지는 사육이 어려운 동물이었기에 그들의 삶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동이 잦은 유목 생활에서 돼지는 도저히 끌고 다닐 수 없는 동물이었고, 결국 유목민은 돼지를 배척하고 농경민은 돼지를 품에 안았다. 이것이 문화적 상징의 차이로 굳어졌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역시 명확하지는 않다. 중국과 접경한 유목민들이 돼지를 잘 사육하고, 그것으로 중국인들과 거래해 온 사례는 이미 언급된 바 있다.
이 밖에도 멧돼지가 셈족 문화권에서 신성한 동물이었기 때문에 금기가 생겼다는 흥미로운 가설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어느 하나도 결정적으로 이 금기의 기원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가장 가능성 큰 해석은 이 금기가 다양한 역사적·문화적 요인의 복합적인 결과라는 점이다. 어쨌든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이러한 이유로 돼지와 돼지고기를 중심으로 한 문화에서 벗어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상황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 예컨대 2003년 이스라엘에서는 굽이 둘로 갈라지지 않은(비정통적 유전자 변형) 돼지 품종을 개발하여 ‘코셔(정결) 돼지고기’의 등장을 선언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얼마나 빠르게 사회 전반에 퍼질지는 예측하기 어렵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과거의 금기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 이제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보자.
유럽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변화 없이 유지되던 돼지 사육 방식이 산업혁명 시기를 맞이하며 다시 주목받게 된다. 산업혁명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시키며 기존의 식량 생산 체계를 압박했고, 그 결과 식량 생산량을 대폭 늘릴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해졌다.
물론 농업 구조에 대한 변화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15세기부터 플랑드르나 런던, 파리 같은 대도시 주변에서는 ‘4윤작(四輪作, four-field system)’이 도입되었으며, 이는 작물 순환 외에도 가축을 우리에 넣어 키우는 방식으로 바뀌게 했다. 가축을 방목하기보다는 고정된 장소에서 사육하는 편이 거기서 나오는 분뇨를 농지로 옮기기에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집중되기 시작한 18세기 영국 산업 중심지의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돼지고기는 고급 육류 공급원으로 다시 한번 각광을 받게 된다. 문제는 18세기까지도 돼지 품종 개량은 체계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육 방식은 주로 경험에 의존했고, 교배는 계획 없이 이루어졌으며, 새 품종이 나타나더라도 대부분 불완전한 형태였다.
숲이 사라지고 자연 방목이 중단된 수 세기 동안 돼지는 외부 환경과 차단된 채 마당의 우리에서만 자라게 되었고, 돼지의 진화는 점차 ‘집 안의 동물’로 고정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이 감자와 옥수수를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감자는 처음에는 사람이 먹지 않고 오직 돼지 사료로만 사용되었으며, 옥수수 역시 수확량이 많고 돼지가 좋아하는 작물로 주목받았다. 이러한 작물 덕분에 가정 사육이 점점 더 일반화되었다.
■ 사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선택 교배를 해왔지만, 시대의 요구가 수많은 농민이 본격적인 품종 개량에 뛰어들게 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로버트 베이커웰(Robert Bakewell)’이다. 18세기 중반 그는 체계적인 선발을 통해 영국인에게 익숙한 레스터 양(Leicester sheep)을 혁신적으로 개량하였다. 그의 성과는 놀라웠다. 뼈대는 가늘고, 털은 고급이며, 체중은 늘었는데 몸집은 커지지 않았다. 즉 뼈 무게를 줄이는 방식으로 고기 비율을 높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새끼는 빠르게 자라며 생산성이 매우 높았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베이커웰이 자신이 목표한 결과를 계획적이고 반복적인 교배를 통해 정확히 이뤄냈다는 점이다. 이 성과는 단순한 학문적 발견이 아니라, 실제 경제적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우수한 숫양을 한 철 임대하는 방식으로 무려 6,000기니를 벌었으며, 이는 한 해 동안 한 마리 숫양으로도 사람을 부자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후 베이커웰의 이름은 전 유럽에 알려졌고 그의 성공 사례는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다. 사람들은 가축 개량에서도 ‘기적’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농부와 연구자들이 품종 개량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열기에도 불구하고 가축 개량은 그렇게 빠르게 진전되지는 않았다. 당시 생물학은 여전히 창조론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었고, 새로운 종이 인간에 의해 창출될 수 있다는 개념은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품종 개량에 뛰어든 실천가들 다수는 이런 이론적 배경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몰랐으며, 오직 현장의 필요와 경험만으로 동물 사육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로버트 베이커웰은 가축 사육이라는 직업을 존경받고 수익성 있는 분야로 만든 인물이었다. 1851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8년 전 영국 윈저에서 열린 농업 박람회에서는 이와 관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직조공이었던 조지프 툴리(Joseph Tooley)는 가축 개량에 큰 흥미를 느껴 독자적으로 육종에 도전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돼지 품종을 출품했다. 그의 돼지들은 가슴이 넓고 몸통이 길며, 외형적으로도 기존의 짧고 땅딸막한 돼지들과는 뚜렷하게 달랐다. 툴리는 근친 교배를 조심스럽게 적용했으며, 당시로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방식이었다.
처음 이 품종은 ‘요크셔’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이후 공식적으로는 ‘영국 대형 백색종(English Large White)’으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툴리는 가난했기에 이 유전적 자산의 가치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그는 경제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개발한 모든 돼지를 ‘윈먼’이라는 다른 사육자에게 판매했으며, 그 가격은 돼지들의 실제 가치에 훨씬 못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비록 툴리는 그 대가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지만, 영국 대형 백색종은 이후 전 세계 돼지 품종의 기반이 되었다. 이 품종의 등장은 돼지 사육 분야에서 육종 붐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19세기 말, 덴마크에서 일어난 품종 개량의 대전환
19세기 말 덴마크에서는 돼지 품종 개량 분야에서 획기적인 진전이 이루어졌다. 덴마크 정부는 1880년대부터 농업 구조 전반을 재편할 필요성을 느끼고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과거 곡물 중심 국가였던 덴마크는 러시아, 폴란드, 미국, 아르헨티나, 루마니아 같은 대규모 곡물 생산국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었고, 여기에 물류 혁명까지 더해져 곡물 수입이 훨씬 쉬워지자 자국 곡물 산업의 한계가 뚜렷해졌다. 이에 따라 덴마크는 곡물에서 가축산업 중심으로 전환하기로 하였다. 단순한 전환이 아닌, 고품질 축산물 생산을 목표로 했고, 이는 고급 장비와 체계적인 사육 방식이 요구되는 구조였다.
재정 자원이 부족했던 덴마크는 국가 재정 대신 협동조합(Cooperative) 모델을 선택했다. 협동조합 실험은 유제품 분야에서 먼저 이루어졌고, 이는 대성공을 거두며 덴마크 버터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후 돼지고기 분야로 확장되었고 여기서는 상황이 더 복잡했다. 기존 덴마크 토종 돼지는 고급 제품을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영국 대형 백색종과 덴마크산 장귀 돼지(long-eared local breed)’를 교배하여 ‘덴마크 랜드레이스(Danish Landrace)’라는 새로운 품종이 탄생하였다. 이 품종은 베이컨 생산에 최적화된 품종으로 지방층이 얇고 육질이 뛰어난 특징을 지녔다. 덴마크 버터에 이어 덴마크산 베이컨 또한 세계 시장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덴마크 베이컨’은 영국 시장에서 특히 인기를 끌었다. 영국은 자체적으로도 뛰어난 품종을 갖고 있었지만, ‘베이컨 없는 아침은 아침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돼지고기를 일상적으로 소비했고, 덴마크 베이컨은 그 수요에 부응하는 품질을 갖추고 있었다. 이후 미국, 유럽, 러시아 등으로 수출되며 덴마크산 돼지고기는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 랜드레이스의 세계 진출
초기에는 덴마크 랜드레이스는 수출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1949년 농업 협정 체결 이후 제한이 풀렸다. 같은 해 첫 20마리의 덴마크 돼지가 영국에 수출되었고, 이후 미국, 캐나다, 기타 여러 나라로 확산하였다. 이후 덴마크 랜드레이스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품종의 기초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유전적 특징은 세계 곳곳의 돼지 품종에 영향을 주고 있다. ‘랜드레이스(Landrace)’라는 이름을 가진 유명한 돼지 품종은 본래 ‘토착 품종’이라는 뜻을 가지며, 이 단어는 돼지 외에도 다양한 동식물에 널리 사용되는 일반 명칭이다.
새로운 품종이 개발되는 것과 동시에 고기를 손질하고 저장하는 기술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중세 시대의 정육 지침서에 따르면, 당시 돼지 한 마리를 해체하는 데는 정육사 한 명과 보조자 한두 명이 붙어 하루 종일 작업해야 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산업 생산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런 비효율적인 방식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산업형 도축장이 등장하면서 세계 최초로 컨베이어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작업을 분업화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즉 한 사람은 한 가지 동작만 반복하는 방식이다. 이 시스템이 적용된 도축장에서는 약 100명의 작업자가 한 라인에 배치되어, 당시 기준으로 하루 12~14시간에 약 2,300마리의 돼지를 해체할 수 있었다. 이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산성 향상을 보여준다. 또한 19세기 중반에는 위생상의 이유로 인해 도축장이 도시 외곽으로 이전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도시 한복판에 있던 도축장이 점차 사라졌으며, 이는 공공보건과 환경 문제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동물의 도살 방식에 대한 윤리적 문제도 제기되었다. 기존의 정육용 칼로 직접 죽이는 방식은 비인도적이라는 인식이 확산하였고, 이에 따라 새로운 방식들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가스를 먼저 사용한 후 도축하는 방법이 시도되었으며, 이후에는 전기로 동물을 먼저 기절시킨 후 도축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변화 흐름에서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러시아의 남부 지역에서는 양돈산업이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그 중심지는 폴타바, 오데사, 보로네시, 로스토프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 지역은 러시아 내에서 대표적인 돼지 사육 중심지로 인식되었고, 국가 전체의 돼지고기 생산량 증가를 이끌었다.
19세기의 도축장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장형 시스템의 전신이었다. 당시에는 도축 작업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논의가 이어졌고, 그중 하나는 도축 노동자들 사이에서 정신 질환이 자주 발생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었다. 이는 도축 방식 자체에 대한 윤리적, 심리적 문제의식을 자극했고, 이러한 실험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전 인류가 수용할 수 있는 완벽한 도축 방식은 아마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시험관에서 배양한 인공 고기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스타트업이 이 분야에 도전하고 있으며, 독자들도 이러한 기술의 발전을 매우 진지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공 배양육은 맛있고 안전한 미래의 식량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돼지고기 산업의 현황을 살펴보면 세계 최대의 돼지고기 생산국은 여전히 중국이다. 중국은 전 세계 사육두수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과 유럽연합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수치다. 러시아는 비교적 최근까지 돼지고기를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였지만, 현재는 수출국으로 전환하였다. 자국민의 식습관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전체 육류 중 약 3분의 1이 돼지고기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돼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육되는 포유류 중 하나이며, 총 사육두수는 통계마다 다르게 나타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산업 동물이라는 특성 때문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매년 15억 마리 이상의 돼지가 소비된다는 점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 세계 인구의 일부는 종교적 이유나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이런 금기는 일종의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돼지고기는 현재 가장 대중적이고 많이 소비되는 육류로 꼽히고 있다. 최근에는 닭고기의 소비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돼지고기와의 경쟁이 심화하고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소비 트렌드가 급격히 변화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월간 한돈미디어 2025년 120~132p